
이동진 평론가가 〈데어 윌 비 블러드〉를 해설하면서 가장 강조한 건, 이 영화가 단순한 탐욕의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한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캐릭터 스터디인 동시에, 20세기 초 미국 자본주의의 성장 과정을 우화처럼 보여주는 이중 구조라는 거죠. 저도 처음엔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캐릭터의 광기에만 집중했는데, 이 해설을 듣고 나니 영화 전체가 훨씬 더 거대한 그림으로 읽히더군요.
자본주의 이념을 인간의 얼굴로 그린 방식
이동진은 플레인뷰를 그냥 악당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인간의 형태를 빌린 것처럼 해석합니다. 이 남자는 돈 자체보다 성공을 향한 끊임없는 투쟁에 더 몰입하는 사람이죠. 영화 중반에 스탠다드 오일 회사가 거액을 제시하며 은퇴를 권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플레인뷰는 "그럼 난 뭘 하나요?"라고 되묻습니다. 돈을 받고 물러나는 게 아니라, 계속 싸우고 확장하는 과정 자체가 이 사람의 존재 이유라는 거죠. 이 해석은 꽤 설득력 있었습니다. 1898년부터 1927년까지 약 30년을 다루는 이 영화의 시간 설정도 우연이 아니라는 분석이 인상적이었어요. 1893년 대공황 직후부터 1929년 대공황 직전까지, 미국 자본주의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를 정확히 담아낸 거죠. 플레인뷰의 연설 장면에서 그가 항상 "미국 전체를 가로질러 여러분 앞에 섰다"고 말하는 것도, 서부 개척과 자본 확장의 역사를 상징한다는 해석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하게 됐는데, 이 영화가 석유를 '피(blood)'로 대체한 제목 자체가 이미 모든 걸 말해준다는 점입니다.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석유는 땅이 흘리는 피이고, 그 석유를 캐내는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목숨을 잃죠. 세례식 장면에서 목사가 "예수의 보혈"을 외칠 때, 플레인뷰가 진짜 원하는 건 석유라는 '피'였다는 해석은 정말 섬뜩했습니다.
가족관계를 사업 도구로 전락시킨 순간
이동진이 가장 공들여 설명한 부분은 플레인뷰와 양아들 H.W.의 관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차에서 아들을 버리는 장면을 전환점으로 보는데, 이동진은 그보다 앞선 유정 폭발 장면이 진짜 '파우스트적 순간'이라고 분석합니다. 석유가 분출하는 걸 보고 환희에 젖은 플레인뷰가 다친 아들을 뒤로 미룬 채 현장으로 달려가는 그 장면 말이죠. 저도 이 해석에 거의 동의합니다. 그 순간 이 남자는 아들보다 성공을 택했고, 그게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거죠. 이후 아들을 기차에 태워 보내는 건 이미 결정된 수순일 뿐이었다는 겁니다. 플레인뷰에게 아들은 '아들'이기 이전에 '동업자'였고, 사업에 유리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는 분석이 너무 명확하더군요. 헨리라는 가짜 동생이 등장하면서 이 구조는 더 적나라해집니다. 진짜 핏줄이라고 믿었던 헨리가 나타나자 플레인뷰는 양아들을 버리고, 헨리가 가짜로 밝혀지자 그를 죽입니다. 결국 이 남자에게 가족이란 진심의 대상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교체 가능한 사업 파트너였던 셈이죠. 1927년 마지막 장면에서 결혼한 아들이 찾아와 독립을 선언하자, 플레인뷰는 "넌 동업자를 그만두는 거야"라고 받아들이고 완전히 내쳐버립니다.
종교비판이 아니라 두 사업가의 대결
일라이와 플레인뷰의 관계를 단순히 종교 대 자본의 대결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동진은 정반대로 해석합니다. 일라이 역시 종교를 빙자한 사업가일 뿐이라는 거죠. 실제로 영화를 보면 일라이는 아버지가 싼값에 땅을 넘긴 것에 분노하고, 5천 달러 보너스를 받아 교회를 세우는 데 집착하며, 마지막엔 투자 실패로 몰락해 플레인뷰에게 돈을 구걸하러 옵니다. 제 경험상 이 해석이 훨씬 더 영화의 냉소를 잘 포착한다고 봅니다. 두 사람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게임을 하는 거죠. 하나는 석유를 팔고, 하나는 구원을 팝니다. 폴 다노가 일란성 쌍둥이 폴과 일라이를 모두 연기한 것도 이 구조를 강화하는 장치였다는 분석이 흥미로웠어요. 두 형제가 플레인뷰와 계약할 때 보이는 태도 차이, 예를 들어 폴은 현재의 500달러를 요구하고 일라이는 미래의 보너스를 요구하는 식의 대비도 결국 같은 욕망의 다른 시제일 뿐이라는 겁니다. 마지막 볼링장 장면에서 플레인뷰가 일라이에게 강제로 배교를 시키고 "내가 제3의 계시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넘어갑니다. 이동진은 이 장면을 "자본주의가 더 이상 가족주의나 기독교를 내세울 필요가 없어진 순간"으로 읽습니다. 자본은 이제 그 자체로 충분히 강력하니까,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날것으로 드러나도 된다는 거죠. 솔직히 이 해석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그냥 플레인뷰가 일라이에게 복수하는 장면 정도로만 봤거든요. 하지만 "다니엘 플레인뷰가 다니엘 스페셜 비전으로 끝나는 이야기"라는 이동진의 표현을 듣고 나니, 이 영화가 왜 이렇게 섬뜩한지 확실히 이해가 됐습니다. 성경 속 예언자 다니엘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결국 종교적 비전이 전혀 없는 '평범한 시각(plain view)'으로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아이러니죠. 정리하면, 〈데어 윌 비 블러드〉는 한 인간의 몰락기이면서 동시에 미국 자본주의의 초상화입니다. 가족도 종교도 결국 자본 확장의 도구로 전락하고, 마지막엔 자본 그 자체만 남는 과정을 2시간 반 동안 보여주죠. 이동진의 해설은 이 두 겹의 이야기를 동시에 읽어내면서, 왜 이 영화가 21세기 최고작 후보로 계속 거론되는지를 명확히 설명해줍니다. 저는 이 해설을 듣고 나서 영화를 다시 봤는데, 완전히 다른 영화처럼 느껴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