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관에서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올 때마다 저는 그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습니다. 그런데 최근 《No Other Choice》를 분석한 글을 읽고 나서 깊이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스타일이 뛰어난 작품이 아니라, 디지털 노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VFX 노동이 만들어낸 인공적 자연
영화 초반부터 등장하는 배롱나무 장면은 저도 극장에서 봤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꽃잎들이 너무 완벽하게 떨어지더라고요. 바람에 흩날리는 게 아니라 마치 프로그램으로 계산된 것처럼 정교하게 움직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장면 대부분이 디지털 작업으로 만들어진 거였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원래 과장된 비주얼을 즐겨 쓰는 편이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그 인위성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나무 줄기는 실제로 촬영했지만 꽃잎 상당수는 후반 작업에서 추가됐고, 심지어 카메라 렌즈를 기어가는 벌레까지 CG로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자꾸 "이건 진짜일까, 가짜일까"를 따지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그게 바로 이 영화가 의도한 효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만수는 제지 공장 관리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집에는 온실과 나무로 지은 집이 있습니다. 숲을 베어내는 산업에서 일하면서 정작 본인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죠. 이 모순된 설정이 VFX로 만들어진 인공 자연과 겹치면서 묘한 울림을 줍니다. 실제 노동자들은 자신이 만드는 제품에 애정을 갖지만, 그 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결국 무언가를 파괴하는 일이니까요.
보이는 VFX와 보이지 않는 VFX의 차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나오는 박사장 집, 그 집의 절반 이상이 CG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 들었을 때 깜짝 놀랐거든요. 이게 바로 '보이지 않는 VFX'입니다. 관객은 그게 디지털 작업인지 전혀 모르고 지나갑니다. 《기생충》이 빈부격차와 은폐를 다루는 영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보이지 않는 VFX가 영화의 주제와 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반면 《No Other Choice》는 VFX를 일부러 티 나게 만듭니다. 배 나무잎을 갉아먹는 벌레들은 너무 선명하면서도 질감이 없어서 한눈에 CG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명백히 드러나는 디지털 효과는 관객에게 "이건 누군가 만든 거야"라는 인식을 심어줍니다. 저는 이 부분이 정말 영리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VFX 산업은 지금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프로젝트 단위로 고용되고, 촉박한 마감 시한에 쫓기며, 무한 수정 요구를 감당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VFX 아티스트 한 분은 한 장면을 30번도 넘게 고쳤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고생 끝에 만들어진 이미지는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보여야 합니다. 노동의 흔적은 지워져야 하는 거죠. 《No Other Choice》는 그 흔적을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VFX 노동 자체를 화면 위로 끌어올립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만수는 완전히 자동화된 제지 공장을 돌아다니며 종이 롤을 나무 막대기로 두드립니다. 기계가 다 알아서 한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손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죠. 그런데 그가 두드린 종이가 굴러 떨어지는 모습이 묘하게 부자연스럽습니다. 너무 매끄럽고, 거의 살덩이처럼 미끄러지듯 떨어지더라고요.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것도 CG구나"라고 직감했습니다. 영화 내내 종이는 '아날로그' 매체로 강조됩니다. 한 등장인물은 종이로 만든 제품을 나열하며 "바이닐로 음악 듣고 필름으로 영화 보는 것"과 비교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종이를 보여주는 방식은 디지털입니다. 이 역설이 재미있으면서도 씁쓸합니다. 우리는 아날로그를 그리워하지만, 그 그리움마저 디지털 기술로 재현하고 있으니까요.
영화 산업 구조의 집단 창작과 개인 저자성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보통 감독 이름을 기억합니다. 박찬욱, 봉준호, 크리스토퍼 놀란. 하지만 실제로 그 이미지를 만든 사람은 수백 명에 달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영화를 '감독의 작품'으로만 생각했는데, VFX 산업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특히 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거대한 협업 시스템 위에서 완성되는 거더라고요.
《No Other Choice》를 작업한 덱스터(Dexter)라는 서울 기반 VFX 스튜디오는 평소 사람 중심 가치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AI 기반 도구와 기술에 대한 특허도 여럿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모순적인 상황이 영화 속 주인공의 처지와 정확히 겹칩니다. 만수는 AI가 일자리를 대체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동료들을 제거하는데, 결국 그가 얻은 자리는 완전히 자동화된 공장의 관리자일 뿐입니다.
영화 비평은 대부분 '작가주의' 관점에서 쓰입니다. 감독의 의도, 감독의 스타일, 감독의 세계관.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건 점점 더 현실과 동떨어진 방식입니다. 현대 영화, 특히 VFX가 많이 들어간 영화는 누가 뭐래도 집단 창작입니다. 물론 감독이 전체 방향을 잡는 건 맞지만, 실제 이미지를 완성하는 건 수많은 기술자들이거든요. 저는 영화 크레딧을 끝까지 보는 습관이 있는데, VFX 팀 이름이 스크롤되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지는 게 느껴집니다.
영화 엔딩 크레딧은 종이처럼 보이는 디지털 배경 위로 흐르고, 그 사이로 나무가 파쇄기에 갈리는 장면이 삽입됩니다. 그 나무가 진짜인지 CG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걸 파괴하는 기술만은 분명히 실재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미지의 진위를 따질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노동과 그로 인한 파괴는 여전히 현실이라는 것. 가장 불안한 건 이제 VFX조차 생성형 AI로 대체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적어도 "사람이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조차 불확실해졌습니다. 저는 최근 몇몇 영화 예고편을 보면서 "이거 AI로 만든 거 아냐?"라는 의심을 하게 되더라고요. 박찬욱의 영화는 아직 큰 로봇이 공장 바닥을 돌아다니는 수준의 AI를 그리지만, 현실의 AI는 훨씬 더 교묘하게 침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VFX가 좋냐 나쁘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소비하는 이미지 뒤에 어떤 노동이 숨어 있는지, 그리고 그 노동이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되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저는 앞으로 영화를 볼 때 화면뿐 아니라 그 화면을 만든 사람들까지 함께 떠올려보려 합니다. 그들의 노동이 있었기에 우리가 감탄하는 이미지가 존재하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