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을 준비할 때 가장 고민되는 건 '어디를 갈 것인가'입니다. 흔히 알려진 관광지도 좋지만, 저는 영화 속 장소를 직접 찾아가는 여행이 훨씬 깊은 감동을 준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콜로세움을 보면서 '글래디에이터'를 떠올렸을 때,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영화 속 장면을 현실에서 재생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작았던 규모, 실제 지하층 구성, 관객석을 보면서 천년 역사를 눈앞에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촬영지를 찾아가는 특별한 이유
영화 속 장소를 직접 방문하면 단순히 '예쁜 곳'을 보는 것 이상의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배우의 동선, 카메라의 위치, 빛의 방향을 상상하면서 창작자의 시선으로 그 공간을 다시 읽게 됩니다. 제가 '냉정과 열정사이'를 보고 이탈리아를 처음 갔을 때가 그랬습니다. 영화 내용을 뒷받침하는 이탈리아의 전반적인 분위기, 수많은 아름다운 성당들, 작은 길거리 풍경들, 따뜻한 햇볕이 영화를 떠올릴 때 더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스의 카스텔로리조 섬은 영화 '지중해'를 찍은 장소인데, 이곳은 일주일에 딱 한 번 비행기가 왔다 갔다 하는 작은 섬입니다. 인구 200명 남짓한 마을에서 주민들과 어울리면서 보낸 시간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꿈결처럼 느껴집니다. 암벽 위 분지에 누워 햇볕을 쬐며 멀리서 들려오는 양떼 방울 소리를 들었던 그 순간은, 어떤 유명 관광지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튀니지의 마트마타는 '스타워즈' 촬영지로 유명한데, 땅을 파서 그 안에 벽을 뚫어 집을 만든 혈거 마을입니다. 루크 스카이워커가 삼촌 집에서 살 때 바로 그 집이 여기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었던 예전 지역이라 이국적인 압도감이 엄청났습니다. 몇 년 뒤 바르도 뮤지엄 테러 사건 소식을 들었을 때, 제가 직접 그곳을 걸었던 기억 때문에 단순한 국제 뉴스가 아니라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계획은 느슨하게, 경험은 깊게
여행 계획을 짤 때 저는 닥쳐야 짭니다. 오늘까지 예약 안 하면 취소가 불가능한 바로 그 시점까지 밀고 나가는 타입입니다. 계획을 짜면서 설레는 분들도 많지만, 저는 준비는 별로 안 하되 가서는 최대한 열어서 습득하는 편입니다. 국내 여행은 자료 조사 10분으로 끝냅니다. 충남 당진의 신리 성지나 마서항 같은 곳도 누군가 따라가다 알게 된 곳이었는데, 개인 여행으로 가도 너무 좋았습니다.
여행지를 고를 때는 영화를 찍었던 곳이 가장 큰 선택 이유입니다. 더 폭넓게 말하면 문화예술, 책, 음악과 관련된 곳입니다. 아이슬란드를 가고 싶은 건 프리드릭 토르 프리드릭슨 감독의 '버림받은 천사들'에서 본 풍경, 비욕이나 시규어 로스 같은 뮤지션들이 들려준 소리, 유럽에서 거의 최후로 나라가 된 천년 역사가 결합해서입니다.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습득된 결과로 여행지가 결정됩니다. 여행 속도도 중요합니다. 사진을 찍고 싶어 하니까 한 장소에서 오래 머물고 싶은데, 방송 촬영 같은 일정에서는 나는 관심 없는 곳도 가야 하고 시간도 촉박합니다. 뉴욕을 20번쯤 갔는데 자유의 여신상은 방송 찍을 때 처음 가봤습니다. 거기까지 가는 게 별로 하고 싶은 경험이 아니었고, 동네 서점을 더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묘지에서 발견한 여행의 깊이
여행지를 가면 꼭 방문하는 장소가 있는데, 저는 묘지를 자주 다닙니다. 특히 잘 모르는 나라일수록 묘지를 찾아갑니다. 묘지는 인류학적으로 가장 그 문화다움을 보여주는 곳 중 하나이고, 죽음이라는 테마에 사로잡혀 있기도 합니다. 묘지 자체가 갖고 있는 이상한 아늑함도 좋습니다. 공포스럽다기보다는요. 유럽의 허름한 묘지에 가면 가족 묘비를 같이 쓴 경우가 많아서 300년 400년 된 가족들이 쭉 적혀 있습니다. 1786년에 태어나서 1825년에 죽은 사람을 보면, 그 시기가 프랑스 혁명과 겹치는 부분도 있고, 40대 나이에 왜 죽었을까 하는 상상이 이어집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그 시대를 상상하는 경험은 어떤 박물관에서도 얻기 힘듭니다. 물이 있는 풍경도 자주 찾습니다. 바다보다는 내륙에 있는 계곡, 운하 같은 물풍경을 좋아합니다. 서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읽을 수 없는 책도 삽니다. 프랑스어를 못 읽는데 프랑스 책을 사오기도 합니다. 레코드샵과 벼룩시장도 가급적 갑니다. 벼룩시장에 가면 가장 친밀한 민속 문화를 볼 수 있고, 물건 파는 사람들은 가장 그 나라 사람 같은 사람들이 팝니다. 서울에서 제일 재밌는 동네가 황학동인데, 그런 비교도 재미있습니다.
해외 여행이 주는 진짜 가치
해외 여행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책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듯이요. 그럼에도 해외 여행이 가치 있는 이유는 경험의 확장 때문입니다. 튀니지 바르도 뮤지엄 테러 사건을 들었을 때, 제가 그곳에서 어떤 시간을 겪었는지가 너무 생생했기 때문에 단순한 국제 뉴스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저도 그 시간에 있었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가본 적 없는 나라,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는 나라에 대해 편견을 가지기 쉽습니다. 국제적인 수많은 문제에 대해서도 함부로 격렬한 증오나 편견을 드러내면서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일 수 있습니다. 여행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을 만들어 주는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역지사지도 가능해지고 보는 시선도 넓어집니다. 바티칸을 방문했을 때는 다양한 첩보물에서 비밀기지로 묘사되는 시설인 만큼 관람 내내 흥미로웠고, 여행 후 '콘클라베' 영화를 봤을 때 바티칸의 고요함에서 오는 소리 없는 정치 전쟁을 간접 경험할 수 있어서 더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영화 관람 취미와 여행 경험이 합쳐질 때 그 경험은 몇 배로 체험됩니다. 화면이 아니라 현실을 통해 다시 보는 것입니다. 심지어 영화가 개봉된 시점에 교황의 타계는 영화에 이상한 힘을 부여해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여행은 반드시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해외 여행이 주는 경험의 확장, 편견의 해소, 시선의 확대는 분명히 가치 있습니다. 돈과 시간이 많이 들고 한국에서 외국 나가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국내 여행도 많이 다니는데, 우리나라도 20년 전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어떤 군, 어떤 시를 가도 정말로 가보고 싶은 곳들이 다 있고 매혹적인 부분들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