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올란도 리뷰 (틸다 스윈튼, 정체성, 살리 포터)

by honeyball 2026. 4. 21.

영화 올란도 영화 포스터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멈추고 싶은데 화면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냥 계속 보게 되는 경험, 다들 한 번쯤은 있으실 겁니다. 저도 올란도를 처음 켰을 때 딱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겠는데, 끄기는 싫은 이상한 상태가 두 시간 내내 이어졌습니다. 결말까지 다 보고 나서야 "아, 이게 그런 영화구나"를 겨우 받아들였습니다. 1992년 살리 포터 감독이 버지니아 울프의 동명 소설을 옮긴 이 작품은, 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재개봉될 만큼 묵직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란도와 틸다 스윈튼이라는 존재

올란도가 다른 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캐스팅 자체가 이미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시간을 넘나들며 남성과 여성 사이를 오가는 주인공 올란도를 틸다 스윈튼이 연기합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역할은 이 배우 말고는 불가능했겠다"였습니다. 성별이 바뀌는 장면에서조차 전혀 어색함이 없고, 오히려 그게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점이 신기하면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틸다 스윈튼은 이 영화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연기를 수시로 씁니다. 이 방식이 요즘 기준으로 보면 Fleabag의 피비 월러-브리지가 했던 방식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1992년 영화에서 이미 그 문법을 쓰고 있었다는 점은, 살리 포터가 단순히 소설을 옮긴 게 아니라 연출 자체로도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이 네 번째 벽 허물기가 처음에는 낯설지만, 익숙해지면 오히려 올란도라는 인물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기분이 듭니다. 영화 말미의 틸다 스윈튼 클로즈업 장면은 솔직히 말하면 저도 당장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Jimmy Somerville이 하늘에서 팔세토로 노래를 부르는 그 마지막 장면은 보는 내내 뭔가 거대한 걸 목격한 느낌인데, 막상 뭐가 그렇게 좋았냐고 물으면 답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영화가 가진 특이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별 정체성을 '설명'하지 않는 방식

올란도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퀀틴 크리습 분)의 총애를 받은 귀족 청년 올란도가 영지와 특권을 하사 받고, 러시아 귀족 여인 사샤(Charlotte Valandrey 분)와 사랑에 빠졌다가 이별을 겪습니다. 오스만 제국 대사로 파견됐다가 돌아올 때 여성으로 변해 있고, 이후 빅토리아 시대를 거쳐 20세기까지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이 긴 시간 동안 올란도는 왜 성별이 바뀌는지, 왜 늙지 않는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꽤 당황스럽습니다(출처:BBC). 저도 처음 볼 때 설명을 기다리다가 결국 그냥 포기하고 장면을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포기가 아니라 이 영화가 원하는 방식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성별이 바뀌는 것을 사건으로 만들지 않고 그냥 일어난 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성별 정체성에 대해 그 어떤 대사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1928년 소설을 쓴 배경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당시 울프의 연인이었던 비타 색빌-웨스트의 귀족 가문이 가진 수백 년의 역사와 자유로운 기질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었습니다. 살리 포터는 소설이 담은 그 감각을 '설명'으로 풀지 않고 이미지와 분위기로 옮기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음악, 의상, 미술이 단순히 시대 배경을 표현하는 장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이야기의 언어로 작동하는 구조입니다(출처:Vogue). 제가 느끼기에 이 영화는 '여성의 시선'으로 인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특히 두드러집니다. 소비하거나 대상화하지 않고, 그냥 존재를 관찰하는 방식이 회화처럼 느껴지는 장면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호불호와 지금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솔직히 이 영화가 모든 사람에게 맞는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기승전결이 명확한 서사를 기대하고 켜면 초반 30분 안에 꺼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이야기 구조가 일반적인 영화처럼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아서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전개가 느리고 설명이 없다는 특성은 분명히 진입 장벽이 됩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요즘 다시 꺼내 보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지금 만들기 어려운 방식의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자극적인 전개 없이 시간과 존재를 천천히 따라가는 구조는, 콘텐츠의 전환 속도가 지금처럼 빠른 시대에는 거의 사라진 문법입니다.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향이 느껴지는 연극적이고 양식화된 장면들, Michael Nyman 스타일의 음악, 그리고 Simon Russell Beale, Toby Jones, Toby Stephens 같은 배우들이 단역으로 등장하는 구성까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조합입니다. 제가 가장 오래 기억하는 건 사실 미로를 달리는 장면이나 옷과 배경이 순식간에 바뀌는 순간들입니다.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그 장면들은 머릿속에 남아서, 나중에 다시 꺼내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재미있었다"보다는 "경험했다"는 말이 더 맞는 영화입니다. 정리하면, 올란도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라 이미지와 감각을 통과하는 영화입니다(출처:Vogue). 완전히 이해했다는 확신보다는 무언가를 느꼈다는 감각이 더 오래 남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재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냥 보러 가시는 것을 권합니다. 한 번 보고 끝내기보다, 한 번 보고 나서도 계속 생각하게 되는 타입의 영화입니다.

영화 올란도 영화 대표 이미지


참고: https://www.theguardian.com/film/2023/mar/09/orlando-review-tilda-swinton-is-magnetic-in-sally-potters-swoony-reverie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