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극이 500만 관객을 넘는다는 건 요즘 시대에 어떤 의미일까요? 장항준 감독의 신작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 직전부터 업계 안팎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저도 개봉 주말에 극장을 찾았는데, 솔직히 예상보다 훨씬 감동적이었습니다. 개유정난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유배지 영월에서의 4개월만 집중한 구성이 오히려 신선했습니다. 청룡포 세트를 실제 영월 동강 지류에 지어 촬영했다는 점도 영화의 몰입도를 크게 높였습니다.
장항준 감독이 사극을 선택한 이유
장항준 감독은 인터뷰에서 "사극은 생각도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주변 친구들도 "네가 사극을 왜 하냐"며 의아해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장르가 매번 달랐습니다. 실증을 잘 내는 성격 탓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장르를 선호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처음 제안받았을 때는 거절했지만, 제작자가 "극장은 큰 틀의 영화가 필요하다"며 설득했고, 감독 본인이 생각한 수정 방향을 20분간 설명하자 제작자가 "그럼 감독님이 하시면 되겠네요"라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최근 몇 년간 사극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고, 제작비도 많이 드는 장르입니다. 게다가 개유정난 이후 단종의 죽음이라는 결말을 이미 모두가 아는 상황에서 스펙터클한 요소가 부족하다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독은 금성대군의 복위 운동이라는 라인을 추가하고, 한명회가 이를 견제하며 흥도에게 지흥지를 가져오라고 명령하는 갈등 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시나리오를 크고 작게 20번 정도 수정하며 중반 이후 라인을 대폭 보강했고, 이 과정에서 영화의 전율을 만드는 핵심 시퀀스가 완성됐습니다.
저는 사극이라는 장르 자체보다, 이 영화가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가'에 집중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수양대군이나 신숙주 같은 주요 인물을 일절 등장시키지 않고, 한명회 한 명만 빌런으로 설정한 것도 과감한 선택이었습니다. 유지태가 연기한 한명회는 기존의 꼬부랑 노회한 이미지가 아니라, 귀골이 장대하고 무예에 출중한 실제 역사 기록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이런 선택들이 모여 영화는 역사의 뒷면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가 만든 화학작용
유혜진은 이 영화에서 정말 독보적입니다. 인터뷰에서 감독은 "혼잣말을 전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배우"라고 평가했습니다. 다리 위에서 유배 오는 대감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혼자 1인 다역을 하며 중얼거리는 모습은, 대사가 명확하게 있는 장면이 아니었음에도 스탭들이 촬영 내내 웃음을 참을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장항준 감독은 배우들에게 "활자가 아니라 본인의 말로 해달라"고 주문하는데, 유혜진은 그 절정을 보여주는 배우입니다. 저는 특히 관아에서 박지원과 함께 단종의 호랑이 격퇴 이야기를 전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이 리허설 없이 즉흥적으로 주고받는 리액션을 보며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박지훈은 이 영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았습니다. 20대 중반의 젊은 배우가 단종이라는 무거운 역할을 소화하면서도 기품과 연약함을 동시에 표현했습니다. 감독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배우"라고 평가하며, "배우들과 일대일 리딩을 철저히 하고 현장에서는 리허설을 최소화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관아 장면에서 태산이 곤장을 맞을 때 단종이 나서는 장면은, 세 배우가 부딪치는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달됐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유혜진이 중간에서 어디로 붙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 연기에 완전히 몰입했습니다. 유지태는 한명회 역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줬습니다. 감독은 "귀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밝아서 모두가 우러러 봤다"는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캐스팅했다고 합니다. 영화 첫 장면에서 한명회가 등장하는 순간, 관객이 그를 납득하느냐가 승부였는데, 유지태는 구부리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조아리지 않는 자세로 왕을 압도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명회 하면 꼬부랑한 이미지만 떠올렸는데, 이렇게 장대한 빌런도 설득력이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느꼈습니다.
영화 흥행 뒤의 숨은 장면들
장항준 감독은 촬영 과정에서 몇 가지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영월 동강 지류에 세운 청룡포 세트는 정말 완벽한 로케이션이었지만, 흥도가 시신을 수습하는 장면을 찍던 날 해가 쨍쨍 뜨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래 밤 장면으로 기획했다가 낮 장면으로 바꿨는데, 막상 촬영일에 구름이 끼어 햇살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감독은 "봉준호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고민했지만 결국 그대로 찍었고, 지금도 "다시 찍고 싶은 장면"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오히려 그 장면이 처연하게 느껴졌는데, 감독 본인은 아쉬워하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유혜진의 제안으로 추가된 장면도 있습니다. 박지훈이 분장실에서 의상을 입은 채로 물가에서 혼자 장난치는 모습을 스탭이 찍었는데, 유혜진이 그 영상을 보고 울컥했다며 감독에게 "이걸 찍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스탭들은 반신반의했지만 감독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이건 산다"고 판단해 촬영했고, 편집 과정에서 시신 수습 직전 장면에 배치했습니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어떤 개를 넘는 순간으로 작동했습니다. 저는 이런 즉흥적 결정이 영화를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촬영 기간 동안 배우들과 스탭들은 모두 영월이라는 도시를 사랑하게 됐다고 합니다. 공기 좋고 사람 좋고 음식 맛있는 곳에서 한 달 넘게 지내며, 감독은 유혜진에게 "저 집 사라"며 농담을 건넬 정도로 편안한 분위기였습니다. 저도 영화를 보고 나서 청룡포에 직접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세트는 침수 지역이라 복구했다고 합니다. 관광 자원으로 남겨두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점이 오히려 낭만적으로 느껴집니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가 지금 이 시기에 500만을 넘는다는 것 자체로 큰 의미를 갖습니다. 넷플릭스나 디즈니 같은 OTT 콘텐츠들이 자극적인 내용으로 도배된 상황에서, 뻔한 실화를 드라마틱하게 풀어낸 감동 영화가 더 흥행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만 현대어 기반의 대사와 속어가 몰입을 방해했다는 의견도 있고, 호랑이 CG는 확실히 아쉬웠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이 만든 화학작용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극장에서 직접 보시길 강력히 추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