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토마스 앤더슨의 신작을 보고 나오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감독이 이렇게 명확한 메시지를 던질 줄은 몰랐다"는 거였습니다. 원작 소설 바인랜드를 읽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토마스 핀천의 소설은 읽히지 않기로 악명 높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 복잡한 소설을 영화로 옮기면서 시대 배경을 과감하게 바꿨습니다. 소설 속 1960년대와 1980년대의 대비를 지우고, 대신 16년 전 과거와 지금 현재를 나란히 놓았죠. 저는 이 각색 방식이 영화의 정치적 메시지를 훨씬 날카롭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시대를 지운 각색, 남은 건 반복되는 실패
원작 소설 바인랜드는 1984년을 현재로 삼아 1960년대를 회상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핀천은 히피 무브먼트와 반전 운동으로 들끓던 60년대와, 레이건 시대의 냉소적이고 보수적인 80년대를 대비시키며 이상주의의 몰락을 그렸죠. 그런데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 시대적 대비를 완전히 버렸습니다. 영화 속 현재는 우리가 사는 지금이고, 과거는 그로부터 16년 전입니다. 역산하면 2009년쯤 되겠죠. 제가 이 각색에서 주목한 건, 16년 전과 지금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설정입니다. 디엔드라의 내레이션이 이걸 직접적으로 말해줍니다. "그 오랜 싸움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요. 이건 원작과 정반대 방향입니다. 핀천은 두 시대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려 했지만, 폴 토마스 앤더슨은 두 시대가 똑같다는 걸 강조합니다. 저는 이 지점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밥이라는 인물을 보면 이게 더 명확해집니다. 그는 과거 프렌치 75라는 좌파 무장 조직의 일원이었지만, 지금은 술과 마약에 절어 딸과의 관계도 망가진 채 살아갑니다. 밤이 되면 알제리 전투 같은 혁명 영화를 보면서 과거를 회상하지만, 정작 자기가 목숨 걸고 외쳤던 혁명의 암호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집결지를 알아내려 할 때, "지금 몇 시냐"는 질문에 "시간은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우리를 지배한다"고 답해야 하는데 그 암호를 까먹은 거죠. 저는 이 장면이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라, 밥이라는 인물이 지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과거에만 묶여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봤습니다. 흥미로운 건, 밥의 적대자인 럭조도 똑같은 방식으로 과거를 잊고 있다는 점입니다. 럭조는 과거에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 정부 예산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 그 발언 때문에 그를 눈여겨봤습니다. 그런데 정작 럭조는 자기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 합니다. 혁명가든 권력자든, 과거의 신념은 지금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죠. 이런 식으로 영화는 양쪽 모두를 비판합니다. 퍼피디아가 이끄는 좌파 무장 조직은 마피아처럼 폭력을 즐기고,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대부 오마주로 묘사되며 역시 마피아와 겹칩니다. 저는 이 균형 감각이 이 영화를 단순한 정치 선전물이 아니라 더 복잡한 작품으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윌라, 엄마를 넘어서는 딸
영화의 후반부는 완전히 윌라의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윌라가 단순히 퍼피디아를 계승하는 게 아니라, 엄마의 실패를 넘어서는 존재로 그려진다는 걸 느꼈습니다. 퍼피디아는 혁명가로서 신념은 확고했지만, 폭력주의자였고 결국 배신했습니다. 반면 윌라는 카체이스 장면에서부터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 카체이스 장면은 시각적으로도 놀라웠지만, 저는 그게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영화 전체의 은유라고 봤습니다. 세 대의 차가 한 방향으로 달리는데, 맨 앞은 윌라, 중간은 그녀를 죽이려는 킬러, 맨 뒤는 딸을 구하려는 밥입니다. 윌라가 길을 이끌고, 밥은 딸이 가는 대로 따라갑니다. 이건 세대 교체의 시각적 표현이죠. 아버지는 더 이상 길을 안내하지 못하고, 딸이 앞서 나갑니다. 카체이스가 끝난 뒤 윌라가 밥에게 암호를 묻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신 누구야?"라고 묻지 않고, 암호문을 먼저 던집니다. 밥은 당황하며 "나 아빠야"라고 답하지만, 윌라는 끝까지 암호를 요구합니다. 이 순간 윌라는 더 이상 도망가는 딸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싸우는 혁명가로 재탄생합니다. 그런데 밥은 암호를 끝까지 외우지 못하고, 결국 "나 너 아빠야"라는 가족 관계의 언어로 자기 정체성을 증명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정치적 공동체의 언어가 가족 관계의 언어로 대체되는 순간이라고 봤습니다. 이건 후퇴가 아니라, 추상적 이념이 더 이상 사람을 구하지 못할 때 관계의 윤리가 남는다는 뜻이죠.
영화가 보여주는 정치의 의미
영화 마지막에 윌라는 엄마 퍼피디아의 편지를 받습니다. 편지에는 자기가 얼마나 철저히 실패했는지가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윌라는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지 않고, 3시간 반을 운전해서 오클랜드 시위에 참석합니다. 이 시위는 퍼피디아가 했던 무장 테러가 아니라, 시민들의 평화적 연대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폴 토마스 앤더슨이 생각하는 진짜 희망이라고 봅니다. 엄마는 폭력으로 실패했지만, 딸은 폭력 없는 저항으로 나아간다는 거죠. 다만 이 해석이 너무 깔끔하게 정리된 느낌도 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는 늘 어딘가 삐걱거리고, 인물들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움직이는 맛이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혼란을 조금 덜어낸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게 이 영화가 더 대중적으로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폴 토마스 앤더슨 특유의 에너지를 조금 잃은 이유라고도 생각합니다. 결국 이 영화는 부모 세대의 실패를 딸 세대가 어떻게 넘어서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퍼피디아와 밥은 둘 다 과거에 묶여 있지만, 윌라는 그들의 실패를 지나 더 나은 방식의 저항으로 나아갑니다. 저는 이 영화가 지금 미국뿐 아니라 지금 세계를 향한 폴 토마스 앤더슨의 드문 직접 발언이라고 봅니다. 혁명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폭력이 아니라 연대로 가능하다는 메시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