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층간소음이라는 소재 때문에 가볍게 웃고 나올 수 있는 코미디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보고 나오니 감정보다 생각이 더 많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하정우 감독의 네 번째 연출작 윗집 사람들, 107분이 끝났을 때 떠오른 건 인상적인 장면이나 대사가 아니라 묘하게 현실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이거, 내 얘기 아닌가?”라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고, 그 순간부터 이 영화가 단순한 이야기 이상으로 느껴졌습니다. 웃으면서 봤던 장면들이 지나고 나니 하나씩 불편하게 다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윗집 사람들이 보여주는 균열의 신호
영화의 시작은 단순합니다. 밤마다 윗집에서 울려 퍼지는 과도한 소음, 그리고 그 소음 앞에서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는 아랫집 부부의 냉랭한 일상. 각방 생활이 몸에 배어버린 정아와 현수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카카오톡으로 대화할 정도입니다. 제가 이 설정에서 먼저 든 생각은 "저 부부, 원래부터 그랬겠구나"였습니다. 층간소음이 관계를 망가뜨린 게 아니라, 이미 균열이 있던 관계가 소음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것뿐이라는 느낌. 영화는 그 지점을 꽤 영리하게 건드립니다. 스페인 영화 센티멘털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지만, 한국 아파트 문화와 부부 관계의 결이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집니다. 윗집 부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장면부터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정우가 연기하는 고등학교 한문 선생 김 선생 캐릭터가 등장하는 순간, 영화는 코미디인지 심리극인지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우아한 말투로 거침없이 내뱉는 19금 대사가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웃음을 유발하는 이유, 저는 그게 배우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사 자체는 분명 세고 직설적인데, 하정우라는 필터를 통해 나오니 어딘가 철학적이기까지 합니다. 특히 식탁 위에서 이어지는 대화 장면은 거의 연극처럼 구성되어 있는데, 카메라는 크게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인물들의 시선과 미묘한 표정 변화를 집요하게 따라갑니다. 김 선생이 아무렇지 않게 부부관계 이야기를 꺼내고, 이에 대해 수경이 학문적인 언어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순간, 정아와 현수의 표정이 점점 무너지는 과정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출처:하퍼스바자코리아).
욕망에 도덕 판단을 내리지 않는 영화
이 영화가 불편하다는 반응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룹섹스라는 소재 자체가 호불호를 가를 수밖에 없고, 이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시각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처음엔 "이걸 어떻게 스크린으로 풀어내려고 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니 조금 달랐습니다. 영화는 이 제안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거나 반대로 단죄하지 않습니다. 이하늬가 연기하는 수경 캐릭터가 "이건 비정상이 아니라 솔직한 욕망"이라고 말하는 순간, 영화는 판단을 관객 쪽으로 완전히 넘겨버립니다. 그 선택이 대담하다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영리한 지점이라고 봤습니다(출처:중앙일보).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는 대신, 그 불편함을 정아라는 캐릭터를 통해 적절히 중화시킵니다. 공효진이 연기한 정아가 없었다면 이야기는 아마 허공에 떴을 겁니다. 윗집 부부가 약간 현실 밖 존재처럼 느껴질 때마다 정아의 반응이 "그래, 나도 저럴 것 같아"라는 감각을 되돌려줍니다(출처:엘르). 정아의 폭발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그건 단순히 화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결핍과 욕망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장면이라, 보는 내내 웃다가 갑자기 뭔가 들킨 기분이 들었습니다. 거의 전체가 식탁 하나를 중심으로 대사로만 진행되는 구조라 후반부로 갈수록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있다는 건 분명한 단점입니다. 대사 밀도가 높은 만큼 한 번이라도 흐름을 놓치면 따라가기 버거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가 한국 영화 최초로 전 구간 한글 자막을 삽입한 이유도 거기 있을 겁니다. 저는 두 번째 관람할 때 자막 대신 배우들의 표정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봤는데, 그렇게 보니 또 다른 디테일이 보였습니다.

이번이 4번째 연출인 하정우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강하게 든 생각은 이겁니다. 윗집 부부는 문제를 만든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뿐이라는 것. 달걀 껍데기가 스스로 깨지는 법은 없으니, 외부의 충격 없이는 정아와 현수 두 사람이 서로를 다시 마주 보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단순한 성인 코미디를 넘어섭니다. 관계의 문제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고, 그래서 웃고 나서도 묘하게 뒷맛이 남습니다. "인생은 영혼의 성장을 위한 학교이고, 결혼은 지옥훈련 코스"라는 대사가 그냥 웃기려고 쓴 말이 아닌 것처럼. 컬러풀한 미장센도 이 영화를 한 공간에 가두지 않는 데 한몫합니다. 하정우 감독이 직접 그린 그림 액자와 챕터마다 등장하는 강렬한 색감의 그림들이 단조로운 배경 위에 자꾸 새로운 감각을 얹어줍니다. 화가이기도 한 감독의 감수성이 영화 곳곳에 배어 있어서, 보는 내내 "이 사람, 그냥 배우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를 단순히 자극적인 소재의 청불 영화로 소비하기엔 아깝습니다. 불편함을 견딜 의지가 있는 분이라면, 웃고 난 뒤에 남는 그 찝찝함이 꽤 오래 따라올 겁니다. 저처럼 "이거 나 얘기 아닌가" 싶은 순간이 한 번이라도 온다면, 그걸로 이 영화는 제 역할을 한 셈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마지막에 두 사람이 다시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장면은, 극적인 해결이라기보다 아주 현실적인 “미완의 화해”처럼 느껴집니다. 완전히 회복된 관계라기보다는, 이제야 비로소 문제를 직면했다는 상태에 가까운 결말이죠.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씁쓸하게 다가옵니다.